충효당 연혁
 
  창건 및 중수
  예안이씨 세거사
  안동파 분파
  충효당파 종택 창건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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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세 버리고 오로지 본분 닦기 힘써

  사직공의 차남이신 전(荃) 공의 자는 무선(茂先)이며 호는 근재(近齋)로 효성과 우애가 매우 두터웠고 총명한 재질에 학문을 좋아하며 경학(經學)에 밝았다.
  일찍부터 출세의 뜻을 버리고 성리학 공부에 진념했다. 그러나 기묘사화에 많은 어진 선비들이 참혹한 화를 당하는 것을 보고 시 한 수를 읊은 뒤 맏형 생진공과 아우 생원공과 함께 경상도 안동 풍산으로 내려왔다(누리집의 안동파 분파 참조).
화단 터.  북쪽 문을 열면 바로 별당 뒤이고, 그 왼쪽이 자그마한 화단(정원)터다. 펼친 우산 모양의 노간주나무(키 약 2.5m, 둘레 약 8m) 한 그루가 조선조 여인들의 가채머리처럼 똬리를 튼 채 약 3백여 년의 나이를 자랑했다. 그러나 1974년 중수 때 괴석, 매화와 함께 모두 없어지고 지금은 고목이 된 사철나무 한 그루만 남았다.

*이 동네 처녀들의 초례청에는 반드시 충효당 정원의 사철나무와 본채 뒤곁의 대나무를 함께 가져다가 초례상에 꽂고 사철나무와 대나무가 상징하듯 변치 않는 절개와 지조를 맹세처럼 다짐했다.
  공은 매양 이르기를 우리 집 가풍은 청백염근(淸白廉謹)인데 이것을 한결같이 지키는 것이 우리 가문의 교훈이라고 하셨다.
  근사록(近思錄)을 좋아하여 서재에 근재(近齋)라 편액하고 그로써 호(號)를 삼았다.
  공이 경학에 밝고 행실이 바르다 하여 대신들이 경연(經筵)에서 천거하여 중종 21년(1526)에 서부 참봉으로 임용되었으나 나가지 아니하였다.(향교지 편찬위원회, "安東鄕校誌", 안동향교, 1992, 567페이지)
  근재공(近齋公)의 차남인 홍인(洪仁) 공의 자는 경회(景會)이며 호는 풍은(豊隱)이다.
  어려서부터 효성이 남 달랐는 데다가 담략과 지략이 빼어나고 무예에 출중하여 모두들 벼슬길에 나설 것을 권했으나 응하지 아니했다.
  수신제가(修身齊家)로 본분을 닦기에 힘쓸 뿐 드러내기를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세상에서 풍은 공을 아는 이가 거의 없었다.
  오직 임권(任權 : 예조·병조판서와 좌참찬을 지냈음)이 공의 재질을 아껴 중종 34년(1539) 동지사(同知使)로 명나라에 갈 때 아직 소년인 공을 데리고 가면서 함께 일을 의논했다.
  임권이 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로 부임하였을 때 공을 위하여 집을 지어주려 하니 공은 '아직 형님도 집을 변변히 마련하지 못하셨는데 감히 동생이 어찌 좋은 집을 짓겠는가'하며 사양했다. 이에 임 관찰사는 공의 뜻을 더욱 기특히 여겨 형제의 집을 한꺼번에 지어 주었다.
  그 후 형의 집은 변고로 없어지고 말았으나 공의 집은 아직까지 남아 있으니 이 집이 바로 현재의 충효당(忠孝堂)이다.

  재물 풀어 의병 모아 목숨 바쳐 나라 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 왜적이 밀물처럼 들어오자 공은 향리를 지키기 위해 분연히 일어나 가산을 털어 7백여 명의 의병을 모집하여 경상도 안동 구담(九潭)에 진을 쳤다.
  인근의 예천(醴泉), 용궁(龍宮), 다인(多仁) 등지를 지키는 우리 군사가 연달아 패하고 공은 휘하군사를 독려하여 구담을 방어하면서 안동을 향해 쳐들어오는 왜적을 막았다.
  우두원(牛頭院)을 지키던 권전(權詮)이 참패하여 달아나는 등 형세가 위급해지자 공께서 그 군졸을 대신 거느리고 의병장(義兵將)이 되었다. 빗발치듯하는 총탄을 무릅쓰고 분전하다가 선조 27년(1594) 3월 7일 마침내 구담전투에서 장렬히 순국하였다.
  후세에 와서 사림(士林)의 청으로 순조 11년(1811) 나라에서 공의 충의심(忠義心)을 표창하여 정충각(旌忠閣)을 세웠다.(향교지 편찬위원회, "安東鄕校誌", 1992, 567페이지)

  이웃 고을에까지 전설이 된 효행이야기

  풍은공의 9세손인 용눌재(慵訥齋) 한오(漢伍) 공은 효성이 지극하시어 일생을 오직 부모님을 섬기는 데에만 정성을 다하여 고을 내에서 칭송이 자자하였다.
  특히 아버님께서 병환이 위중하실 때 의원으로부터 잉어와 꿩이 특효라는 귀띰를 받았다. 엄동설한임에도 약으로 쓸 잉어를 구하러 십여 리 떨어져 있는 낙동강에 나가 얼음 위에서 낚시를 했으나 잡히지 않았다.
  하루 온 종일 식사마저 굶고, 해는 서산에 지는 데도 잉어는 한 마리도 구하지 못했다. 부모님의 약으로 쓸 잉어를 잡지 못하는 것은 자식의 정성이 부족하기 때문이라면서 간절히 기원하며 여러날을 기다리던 중 밤이 깊어서야 한 마리를 잡았다.
  기쁜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오니 한밤중임에도 뒷산에서 꿩 한마리가 날아드는 지라 붙들어서 리치탕(鯉雉湯)을 만들어 드렸더니 드디어 병환이 쾌유하였다.
  이는 공의 효심이 하늘마저 감동케 했다면서 인근 고을에까지 전설이 되어 오늘날에도 전해지고 있다.
  마침내 아버님께서 78세로 돌아가시자 유교의 가르침대로 3년간 묘막에서 기거하시니 사림에서 이 사실을 알고 출천지효(出天之孝 : 하늘이 낸 효자)라 더욱 칭송이 자자하니 순조 12년에 효자 정려를 명하였다.
  이로서 한 가문에서 충신과 효자가 정려되었음으로 충효당(忠孝堂)이라는 당호가 되었다.
  유교에서 최고의 덕목으로 꼽는 충과 효를 겸비하여 이처럼 쌍(雙)으로 수신(修身)하였음으로 쌍수당(雙修堂), 충과 효는 백행(百行 : 모든 행실)의 근원(百行之源)이기 때문에 백원당(百源堂)이라는 당호도 함께 붙여졌다.

안방과 곳간 사이의 부엌에 있는 수수께끼의 팔각기둥.  부엌에 있는 이유는 뭘까. 온몸을 통째로 드러내면서 왜 홀로 서 있을까. 주춧돌 바로 위는 네모로 깎았고 기둥머리는 아주 소박하다. 이 집의 아주 특이한 것 중의 하나다.


  오늘도 다시 한 번 가훈을 다짐하며

  예안 이씨 충효당이 남다른 의미를 갖는 것은 바로 이 부분이다.
  충신과 효자가 모두 났기 때문에 충효당이라 이름 붙여진 경우는 아주 드물다. 과문한 탓이겠지만 오직 이 집 뿐이지 않나 생각된다. 충신이 나서 효도까지 닦으라고 격려하거나, 효자가 나서 나라나 사회를 위해 헌신하는 큰 사람의 출현을 기대하는 뜻에서 충효당이라 붙여진 경우가 대부분이다.

  예안 이씨 충효당 홈 페이지나 현장을 방문하시는 분들께서는 역사적인 사실에 깊은 관심을 가지시거나 현장 답사에 의미를 두시는 분들이시라 믿는다.
  충효당 후손들은 여러분들과의 이런 거룩한 만남을 좋은 인연으로 이어지기를 기대하며 가전충효 세수인경(家傳忠孝 世守仁敬 : 충성과 효도로 가문을 이어가고 어질음과 공경으로 이웃을 받든다)이라는 가훈을 오늘도 다시 한 번 다짐하며 감사드린다.

760-803 경북 안동시 풍산읍 하리리 189번지 예안이씨 충효당 (054) 858-4768, 070-8880-47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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